'한국형 아우토반'으로 지역발전시킨다는데...[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입력 2024-03-15 06:00   수정 2024-03-15 08:02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은 오랫동안 독일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한 때나마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나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우토반을 건설했어”라는 말은 독일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상징의 생명력은 질겼다. 현대 독일 안팎에서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건설해 경제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식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기도 하다. “총통께서 길에다 실업을 묻어버렸다”는 나치의 선전 문구는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상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때 아우토반을 건설했고, 오늘 우리가 그 위를 달린다.(Es sind auch Autobahnen gebaut worden damals, und wir fahren heute drauf.)”는 표현은 이 같은 감정이 잘 녹아 있는 문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져 왔다. 케인스의 경제 이론에 기반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강력한 투자 프로그램에 따른 경기 대처라는 케인스식 불황 대처법이 행동으로 옮겨진 케이스로 꼽혀왔던 것이다. 당대에 독일 내외에서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이라고 불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우토반을 둘러싼 이 같은 이미지들은 대부분 허구의 ‘신화’에 기초했던 점이 적지 않았다.

우선 아우토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부터 히틀러나 나치 정권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순수하게 자동차 전용도로로 가장 먼저 구성되고 건설된 것은 1913년 완공돼, 1921년 확장된 베를린의 ‘자동차 교통 및 연습도로(Automobil-Verkehrs- und Ubungs-Straße)’였다. 약칭 ‘아부스(Avus)’로 불렸던 이 도로는 나치의 집권 훨씬 이전부터 현실 세계에 존재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실질적인 자동차 전용도로가 계획되고, 건설되기 시작한 것 나치 집권 1년 전인 1932년의 일이었다. 주도했던 인물도 나치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일 서독 초대 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 당시 쾰른 시장이 아우토반의 첫 삽을 떴다. 최초의 아우토반은 쾰른과 본을 오가는 20㎞ 길이의 4차선 도로였다.

하지만 1933년 집권한 나치 정권은 이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가로챘다. 당초 히틀러는 자동차 도로 건설에 큰 관심이 없었다. 나치의 경제 이데올로그였던 고트프리트 페더가 도로의 중요성을 파악해 “제국고속도로의 건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도로 건설 작업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히틀러가 낸 아이디어로 포장했다. 나치는 아우토반을 ‘히틀러 도로(die Straßen Adolf Hitlers)’, ‘총통의 길(Straßen des Fuhrers)’로 부르고, 히틀러가 실업을 없앴다는 선전전을 폈다.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선 아우토반 건설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상징적으로 히틀러가 첫 삽을 뜨고, 연설한 뒤 노동자들이 진국하며 흙을 퍼 나르며 도로 건설에 들어가는 식의 세리머니가 연출됐다. 엔지니어 프리츠 토트를 총책임자로 삼아, 민주국가였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됐을 대규모 건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34년이 되면 독일 전역 22개 지역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1932년 말 1933년 초 현재 불과 수 ㎞에 불과했던 아우토반의 총연장은 1935~1936년이 되면 108㎞로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1937년에는 1087㎞, 1938년에는 3046㎞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획됐던 6900㎞ 구간 중 3800㎞ 구간이 완성됐다. 1938년 시점에 나치 지도부는 아우토반의 총연장을 1만㎞까지 늘릴 계획을 수립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후 도로 건설이 대부분 지지부진해졌지만 말이다.

나치는 아우토반 건설에 총 65억 라이히스마르크의 재정을 투입했다. 처음에는 도로 이용세를 거둬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1936년부터는 차량 보유자들에게 유류세를 올리는 식으로 세원을 넓혔다. 제국철도와 국영은행들이 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재원의 60%가량을 차지했던 것은 나치 정권의 노동 관련 기구(Reichsanstalt fur Arbeitsvermittlung und Arbeitslosenversicherung)였다.

아우토반이 연결하는 도시로는 나치 이데올로기 확산을 상징하는 도시들이 우선순위에 놓였다. 예를 들어 바이에른주에서는 나치의 기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뉘른베르크, 뮌헨, 잘츠부르크 등을 연결하는 구간이 최우선시됐다. 뮌헨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이미 1939년에 완공됐다. 나치 운동의 발상지이자 중심도시, 나치 전당대회가 열린 도시들을 연결하는 것은 특별한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있었다.



아우토반은 통념과 달리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역사학자 볼프강 벤츠에 따르면 1938년 당시 총연장 3800㎞에 불과했던 아우토반의 군사적 유용성은 한계가 있었으며 실제 군대와 군수품의 운송에는 철도가 주로 이용됐다. 또 2차 세계대전 대부분 기간 독일은 석유 부족으로 아우토반에 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고, 대부분 기간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역설적으로 서부 전선에서 히틀러가 만든 아우토반은 연합군의 진군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또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아우토반이 독일의 실업문제 해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13만 명가량의 인력이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했지만 1932년 시점에 6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있었던 만큼, 아우토반 건설이 줄인 실업자 규모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1933년이 되면 이런저런 히틀러 정권의 정책으로 실업자 규모가 480만 명으로 줄어들고, 1935년이 되면 실업자 규모는 270만 명으로 감소된다. 당시 나치는 실업문제를 해결한 점을 지속적으로 선전하며 ‘평온한 미래(ruhige Zukunft)’의 도래를 약속했다.

이 같은 실업의 급격한 감소는 희망이 없던 사회를 순식간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회로 바꿨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대공황에서 호황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플레이션도 발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히틀러의 12년 집권 기간 중 초기 6년간 당시 치유 불가능 하다고 여겨졌던 경제위기와 실업을 빠르게 극복한 모습을 보이면서 당대 독일인들의 지지를 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통계상 수치와는 다소 달랐다. 당시 실업문제 해소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우토반 건설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재무장 조치가 끼친 효과가 컸다. 독일이 본격적인 재무장에 들어선 1938년이 돼서야 군수 분야 고용이 늘면서 독일은 완전고용 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실업자 수는 50만 명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 나치는 군수를 고용 창출로 위장해 군수 확대에 신속하게 돌입하면서 대량실업을 빠르게 극복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여기에 기존에 직업전선에 나와 있던 여성 노동력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통계적 눈속임도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전남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영암과 광주 간 47㎞ 구간에 2조6000억 원을 투자해 한국형 아우토반 같은 초(超)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전남 지역 발전 전략의 하나로 청사진을 제시한 것인데….

많은 고심 끝에 나온 정책일 것이라 믿지만, 경제 발전에선 종합적인 기초 체력이 중요하다. 정책 담당자들이 고속도로 건설만으로 모든 것이 잘 풀리리라고 낙관만 하진 않았으면 싶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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